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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필카'의 추억




새로 산 DSLR을 들고 덕수궁 돌담길에 사진을 찍으러 나갔다가 문득 드는 생각. 찍은 사진을 바로 볼 수 있다니 얼마나 편한가. 잘못 찍었거나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지워버리면 되니 말이다. 

그러면서 십여년 전 학보사 시절, 필름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나가 가슴을 졸였던 기억이 났다. 구도가 틀렸거나 노출이 안 맞으면 어떡하지? 우려는 곧잘 현실이 됐다. 현장에 다시 갈 수도 없고 사건을 재연할 수는 더더욱 없으니 선배한테 죽어라 혼나는 수밖에. 구석진 암실에서 손의 감각만으로 필름을 풀어헤치고 릴에 감은 뒤 현상액에 담그는 작업들. 그리고 인화지에 서서히 형상이 나타날 때의 그 숨막히는 순간을 감히 인고의 시간이라 부르고 싶다.

그 당시에 디카가 있었다면 선배한테 혼날 일은 줄어들었겠지만, 재미는 덜 했을 것 같다. 필카는 그렇게 숱한 인내와 설렘의 추억들을 찍어냈다. 지금은 디카의 편리함에 중독돼 '그녀'를 잊은 지 오래지만 가끔은 옛사랑처럼 떠오를 때가 있다. 이제 '그녀'와 나 사이에는 그저 몇장의 흑백사진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1998년 IMF 구제금융 당시 명동에서 열린 노학연대 투쟁의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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