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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놀이의 경계에서

태풍 하이옌이 할퀸 상처의 현장, 타클로반

 

감사원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다, 평온한 일상을 깨는 회사의 호출. "지금 당장, 타클로반으로 떠날 준비해라. 가장 빠른 비행기편 알아보고." 순회특파원의 숙명이라지만 막상 닥치면,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난다. 

일단 필리핀 세부까지는 들어간다지만, 타클로반은 어떻게 들어가지? 생각이 복잡하지만 일단 부딪혀 본다.

 

 

한국에서 급파된 외교부 신속대응팀과 현지의 세부 한인회를 통해 겨우 미군용기에 몸을 싣고 타클로반으로 향할 수 있었다. 미군용기에 타기 위해 여러 기자들과 가위바위보, 제비뽑기까지 하는 우여곡절 끝에 운좋게 군인들 사이에 몸뚱이을 '끼워넣기' 할 수 있었다.

 

 

살아보려고 탈출하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고 군인들은 무장한 채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주의를 받은 것은 이동할 때 절대 차량 창문을 열지 말라는 것!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약탈과 범죄를 자행하고 있어서 외부인들은 표적이 된다는 거다. 창문을 열면 예민해진 주민들이 달려들어 약탈당한다는 말에, 외교부 신속대응팀과 기자 등 모두 20여 명은 승용차 두 대에 억지로 껴타고 힘겹게 숙소까지 이동했다. 근데 태풍 피해가 적어 성한 건물이 있다는 캅발로간까지는 멀어도 너무 멀었다. 앞도 제대로 안 보이는 어둠 속을 헤매고 헤맨 뒤 한 밤에야 도착했다.

 

 

내가 현지에서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글이 있다.

 

 여기를 빠져나가려고 애를 쓰는 주민들과

 여기에 들어오려고 기를 쓰는 우리들..

'역주행 인생'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미공군기를 타고 겨우 들어온 타클로반!

 순간, "나 잘한 거 맞아?" 

 

 

드디어 도착한 캅발로간. 폭우가 쏟아지는 한밤에 도착했는데 다행히 다음 날은 맑았다. 우울함이 조금은 가셨다.

 

 

 

 

열대지역이라 수시로 폭우가 쏟아졌다.

 

 

낮에는 너무 더웠다. 목이 말랐지만, 위생문제 때문에 맘 놓고 마실 물이 없다. 이곳 마을에 전기가 제대로 안 들어오고 냉장시설도 부족해 시원한 음료를 마시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나마 나의 갈증을 달래준 건, '니콜'이란 가게에서 파는 음료수였다. 얼음박스에 음료수를 담아 파는데 그나마 덜 미지근해서 마실 만했다. 매일 찾아가다 보니 점원은 내 얼굴만 봐도 얼음박스에서 미닛 메이드를 꺼내줬다. 

 

 

낮에 마을을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피부색이 다른 나를 자꾸 쳐다봤다. 그리곤 어김없이 아이들이 하나 둘씩 달려들어 구걸한다. 동네 한바퀴만 돌면 구름같은 아이들을 거느린 '골목대장'(?)이 된다.ㅜㅜ

 

 

일이 끝난 뒤 마시는 시원한 맥주의 맛에 비할 게 있을까. 하지만 시원하지 않은 맥주라면? 전기가 안 들어오는 탓에 늘 미지근한 맥주로 하루를 마무리하다, 시원한 맥주가 간절하게 마시고 싶어 얼음으로 맥주잔을 냉각시켜봤다. 그냥 얼음을 맥주에 타서 먹고 싶은 맘이 굴뚝 같았지만, 얼음의 위생상태를 장담할 수 없어서 참아야 했다.

 

 

아, 모기는 정말 싫어ㅜㅜ "너희들도 생존해야 하니 내 피를 도둑질하는 건 이해하지만, 제발 가렵게만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니?"

 

 

매일 아침 외교부 신속대응팀과 기자들의 브리핑 시간. 오늘 일정을 설명하고 교민 상황에 대한 확인 작업이 이뤄진다. 

 

 

귀국을 명 받고 타클로반 공항으로 이동하던 길.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음울했던 첫날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생동감이 느껴졌다.

 

 

우리 정부 등 세계 각국의 지원도 속속 이어지고..

 

 

 

 

그렇게 오기 싫더니만 막상 며칠 지내면서 적응하니 조금은 정이 들었다. 필리핀에서의 마지막 밤, 그래도 자연에 맞선 인간과 문명의 '회복력'(혹은 '재생력')을 확인하고 떠나게 돼서 마음이 조금은 놓인다. 다시 나의 일상을 '회복'하는 일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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