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본인의 인생 또는 남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무서운 도구다. 그래서 말은 총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대화는 때론 전투요, 전쟁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뤄지는 인터뷰도 겉으로 보기엔 점잖지만 머릿속에선 온갖 전략과 전술이 펼쳐지는 무대다.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가운데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과 기싸움. 두 사람이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지식과 논리로 싸운다. 바로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이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불법 도청 사건으로 사임한 미국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 한물 간 영국 출신 진행자 프로스트의 인터뷰에 관한 이야기다. 워터게이트 사건 직후 아무런 해명 없이 물러난 전직 대통령으로부터 사과와 해명을 이끌어내려는 토크쇼 진행자, 그리고 껄끄러운 질문을 피해 자신의 명예만 남기고 싶은 인터뷰이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결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우리 돈 60억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불하며 나흘 동안 진행되는 인터뷰. 스폰서들이 등을 돌리고 사비를 털어 진행하는 이 게임에서 프로스트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하지만 노회한 정치 거물은 만만치 않은 상대다.
“우리 중에 한 명은 패해.” 이 말처럼 둘은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경쟁구도를 만들어간다. 프로스트에게 이번 인터뷰는 삼류 진행자 신세에서 일류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요, 닉슨에게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해 정계에 복귀할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둘은 대결하면서도 서로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엘리트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현재의 처지와 성공을 위한 강한 열망, 열등감 등등. 치열한 경쟁관계 속에서도 조금씩 닮은 부분을 확인해간다.
결국 마지막 인터뷰 날, 프로스트는 닉슨을 집요하게 추궁한 끝에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리고는 질문지를 던지고 그에게 마음을 터놓고 다가간다. 닉슨의 입에서 사과와 해명이 나오는 순간이다. 그것은 프로스트가 닉슨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말이지 가장 훌륭한 인터뷰 기술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영화에서 가장 돋보는 것은 닉슨 역을 맡은 프랭크 란젤라의 연기다. 마지막 실토의 순간, 클로즈업된 얼굴에 묻어나는 짙은 회한이 인상적이다. 상처와 후회가 담긴 복잡한 심리를 기가 막히게 연기해낸다. 그 순간 프랭크 란젤라는 닉슨 자체가 되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인터뷰는 2006년에 먼저 연극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연극에서 주연을 맡았던 두 배우가 영화에서도 그대로 캐스팅됐다고. 이 둘의 놀라운 연기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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