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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매체분석

90년대 학번을 위한 서정시, 건축학 개론

 

90년대 후반을 돌아보면 떠오르는 것들. 

삐삐, 스티커사진, 비디오방, PC통신(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등등.

 

정치적으로 첫 정권교체에 대한 기대감에 들떴지만,

경제적으로 IMF 체제에 들어가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드리웠다.

사회적으로 한총련이 마지막 발악을 하면서 사그러들었고,

대학생들은 거대 담론보다는 개인적 삶에 둥지를 틀고 물질적 쾌락에 천착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러면서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는데 '접속', '쉬리',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처럼

스토리와 영상미 등에서 젊은 감성이 돋보이는 영화가 인기를 끌었다.

또 HOT, GOD, 신화, 핑클 등이 대거 출현하면서 본격적인 아이돌 시대의 서막을 알린다.

물론 90년대 정서에는 신승훈, 김경호, 토이, 일기예보 등이 더 어울린다. 그리고 전람회도.

 

친구의 권유로 뒤늦게 보게된 영화. 90년대를 회상하게 만드는 마들렌 같은 영화다.

스토리는 단순하고 극적 긴장감도 없지만, 대신 90년대의 감성으로 관객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영화 '써니'가 중년들의 향수를 자극했다면, 이 영화는 한창 사회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30대 직장인들에게 잠시 잊고 지낸 대학시절을 추억하게 만든다.

그래서 영화 자체에 대한 감동보다는 나의 과거에 대한 추억을 감동하게 만든다.

 

서연이 그토록 삐삐 치고 음성을 남겼는데도 그걸 확인도 안 하고 소중한 첫사랑에 종지부를 찍고,

승민은 얼굴도 기억 못했던 옛 첫사랑을 위해 결혼식도 미뤄가며 제주도에 내려와 집 짓는 데 헌신하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들이 있지만 어차피 멜로영화는 이성으로 납득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자.

 

그래서 이 영화는 서사라기보다는, 건축이라는 모티브와 90년대적 상징들을 심어놓은 서정시 같다.

90년대의 감성 키워드를 숨겨놓아 추억을 보물찾기하게 만드는 영화.

나의 대학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들고 잠시나마 설레게 한 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미덕은 충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