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의 꽃이 된 것처럼, 대상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알고 있다지만 개념을 정확히 말하지 못하면 그 대상은 나에게 의미 있는 '꽃'이 아니다. 더 나아가 내가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적으면 적을수록 타인과의 소통에도 문제가 생긴다. 타인과 소통하는 기본은 나 자신이 먼저 여러 사물과 대상들을 곱씹어 정의하는 것이란 마음으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사물과 개념, 가치의 꽃을 피워보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녀석이 바로 운일 게다. 잘된 일이건 잘못된 일이건 사람들은 곧잘 요 녀석을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한다. “운이 더럽게 나빴어.” “정말 운이 좋았어.” 때와 장소, 사람에 따라 요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일상에 다양하게 개입하고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요놈이 요즘에 아주 인기다. 특히 새해를 맞이하면 ‘운세사업’이란 간판을 내건 요놈을 찾아서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요놈을 심하게 신봉하는 샤머니즘파 아주머니들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내 집처럼 드나들곤 한다. 남편 사업, 자녀 교육, 취업, 궁합문제까지 그들에게 운세는 거의 신격화된 교주에 가깝다. 백성이 무서운 줄 모르는 정치인들도 요 운세는 두려운가보다. 특히 선거가 있는 해엔 보좌진들까지 파견해서 운세 정보를 수집하곤 한다.
재밌는 것은 디지털 세대인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운세 열풍이 분다는 것이다. 압구정이나 명동, 대학가처럼 청춘들이 모이는 곳마다 점집이 성황이다. 사주 카페나 인터넷 운세처럼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게 진화하면서 요놈의 운세는 디지털 시대에도 끈질기게 생존해가고 있다.
운세열풍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현대 사회의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사람들을 운세로 이끈다는 것이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우리 사회와 경제가 예측불가능한 불확실의 시대에 왔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종언’을 말했고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말했지만, 결국 이 시대는 ‘확실성의 종언’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과학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자연현상에 대한 인간의 측정능력이 한계에 달하면서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선언했고 복잡계의 과학이 대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거시적인 담론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다. 좀더 우리 사회의 내부에 천착해보면 왜 사람들이 운세에 의지하는지 해답이 나올 것 같다. 정치권은 당리당략에 매달릴 뿐 노선과 방향이 불분명하고 정부의 정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오락가락 일관성이 없다. 고용시장은 불안하고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각박해져 간다. 하지만 무엇보다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성실히 일하면 잘 살 수 있으리라는 상식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 현대사가 권력에의 줄타기와 부동산 투기 등 요행의 산증이 아닌가?
이토록 사회가 예측불가능한 것들 투성이라면 사람들이 의지할 것은 ‘운’밖에 없다. 자신의 의지보다 운에 의지하는 사회, 성실함보다 요행과 대박의 꿈이 판을 치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는 안타깝게도 희망이 없다. 내가 ‘운’이라는 녀석을 싫어하는 이유다. 요놈이 미워서 재미 삼아서도 점을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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