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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의 '꽃'

두 번째 꽃 - 아파트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의 꽃이 된 것처럼, 대상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알고 있다지만 개념을 정확히 말하지 못하면 그 대상은 나에게 의미 있는 '꽃'이 아니다. 더 나아가 내가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적으면 적을수록 타인과의 소통에도 문제가 생긴다. 타인과 소통하는 기본은 나 자신이 먼저 여러 사물과 대상들을 곱씹어 정의하는 것이란 마음으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사물과 개념, 가치의 꽃을 피워보고 싶다.

 


은 인간의 가장 필수적인 생존요소다. 인간은 집을 기반으로 삶을 영위하고 안정과 휴식을 얻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인류는 정착하고 주거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집은 더욱 각별하다. 생존과 안정의 기본적인 기능 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그것을 ‘구별짓기’라고 말했다. ‘구별짓기’는 소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타인과 차별화하는 것을 말한다. 동질적인 소비문화를 향유하는 계층끼리 같은 계급이 되어 다른 계층과 구별짓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구별 짓기 위한 소비의 대상으로써 집, 구체적으로 '아파트'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사회에서 어느 아파트, 몇 평에 사는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한국인들이 아파트를 보는 태도는 이미 우리의 언어생활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광고 문구는 우리의 귀에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또 우리의 마음 속에 아파트는 ‘꿈에 그린’ 곳이고 우리의 지위를 한층 더 올라가게(The Sharp) 해주며 ‘이 편한 세상’이다. 그리하여 어느덧 아파트는 '00 아파트 00동 혹은 00평 짜리에 사는 누구'처럼 우리 자신을 표현해주는 하나의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어른들의 구별짓기에 따라 아이들도 아파트의 종류와 평수에 따라 어울린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의 대명사는 허름한 집마저도 없는 노숙자들로 인식된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토록 아파트에 집착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개발독재시대의 유산이 아닐까. 좁은 땅덩이에서 많은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우리의 개발정책은 무차별적인 아파트 공급정책일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아파트는 성장과 발전의 징표로 덧씌워졌다. 특히 강남의 아파트단지 개발과 함께 이루어진 교통, 환경, 교육 인프라 구축작업은 전 국민들에게 아파트붐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래서 외국인들은 갑갑해하는 ‘닭장’이 우리에게는 신선함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인의 지상최대 목표인 ‘내집마련’의 꿈은 아파트 투기로 얼룩진지 오래다. '사는(live) 곳'이 아닌 '사는(buy) 것'으로써의 아파트에 대한 집착은 삶을 물질에 내맡긴 한국인의 슬픈 자화상이다. 과거에는 넓은 마당을 안고서 이웃과 공존하던 삶이 현대에 와서는 아파트를 통해 단절되고 파편화된 삶으로 변해가고 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던 그 말이 맞다면 우리는 정말 닫힌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 문화의 우울함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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