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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有感

작문 모음

 

 

컴퓨터를 뒤적이다 과거 입사 준비를 하며 썼던 글들이 눈에 띄었다. 지금 얼마나 그때만큼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고 있을까? 비판의식, 문제의식이 사라지고 그저 일상에 순응하며 편하게 살고 있는 건 아닌지 곱씹어볼 일이다.

 

 

‘개천의 용’이 법정에 선 이유


사람들은 좋지 못한 환경에서 뛰어난 인물이 나왔을 때, 흔히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을 즐겨 쓴다. 좋은 예로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책을 쓴 장승수를 들 수 있다.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서울대에 수석으로 합격한 그의 이야기는 당시 어려운 환경에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개천의 용’은 칭찬을 받아 마땅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내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개천의 용’은 분명 유죄의 정황을 벗어나기 힘들다.


우선 ‘개천의 용’은 우리에게 성공만능주의를 부추긴다. 개천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 삶의 가치와 경중을 함부로 따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은 은연중에 우리에게 가치판단을 요구하고 있다. 용으로 거듭나야지만 성공한 삶으로 취급하는 인식이 이 말 속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이 되지 못한 나머지 인생들은 보잘 것 없다는 뜻인가? 용이 되어야만 인정을 받는 성공만능주의, 일등만능주의는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소외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또한 ‘개천의 용’은 지배권력이 만든 일종의 상징조작으로 작용한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은 얼핏 들으면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다고 서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듯하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낮은 이상을 꿈꾸게 함으로써 현재의 열악한 처지를 잊어버리게 만드는 구호에 가깝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80의 대다수 국민들은 20의 부를 나눠가지며 각박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지배계층은 이런 불만을 억제시키기 위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인생 성공기와 사회적 환상을 주입시켜 신분상승을 꿈꾸게 만든다. 아주 낮은 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열악한 현실을 잊고 사는 것이다.


무엇보다 ‘개천의 용’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은폐시키는 역할을 한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 속에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의식이 사라져있고 오직 개인의 노력만이 드러나 있다. 환경적인 차이보다도 개인의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개개인의 문제로 고착화시키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결국 ‘개천에서도 용이 났기’ 때문에 용이 못 된 것은 환경 탓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 부족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보다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은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한다. 개천에서든 큰 강에서든 누구나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회, 그리고 용이든 미꾸라지든 누구나 가치와 존엄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볼 때 ‘개천의 용’은 유죄임이 틀림없다. 만일 끝까지 뉘우치지 않는다면 개천에서 '욕' 나오는 수가 있다.

 

파격

 

‘파격’은 일상의 충격요법이다.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자극이 일상화되어 웬만한 자극에는 반응이 둔한 현대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파격이 필요하다. 영화나 잡지를 홍보할 때 쓰이는 ‘파격 노출’이나 판매를 늘리기 위해 쓰이는 ‘파격세일’ 등은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충격요법인 것이다.


‘파격’이 충격요법인 또다른 이유는 기존의 체제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시도하는 극단적인 해법이기 때문이다. 흔히 한 조직 내에서 상식을 뒤집는 인사(人事)가 단행될 때 ‘파격적’이란 말을 쓴다. MBC가 혁신을 위해 노조위원장 출신의 최문순 사장을 임명한 것이라든지 한겨레가 경영위기를 해결하려고 전문경영인 출신의 정태기 사장을 영입한 것을 들 수 있다. 체제의 위기를 ‘파격’으로 돌파하려고 한 것이다.


위기의 돌파를 위한 ‘파격’은 일반기업에서 끝나지 않는다. 승부사 기질로 유명한 노 대통령에게서도 파격을 자주 볼 수 있다. 국정운영이 어려울 때마다 파격적인 발언과 제안으로 국민들에게 충격을 선사한다.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파격적인 발언이나 총선과 재신임을 연계시키는 파격적인 발상, 최근에는 대통령직까지 내놓겠다는 파격적인 연정론 등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 파격의 중심에 있었다. 가히 파격의 과잉이라 할 만하다.


파격은 진부한 일상에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 변화를 꾀하는 돌파구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파격이 너무 잦아지면 사람들은 파격의 식상함에 빠지게 되고 파격은 더 이상 파격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세상만사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과유불급’은 파격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적재적소에 긴요하게 파격을 사용해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줄 수 있는 대통령의 모습이 그립다.

 

 

“근사한 양복신사, 허름한 청바지 학생도 취하면 모두 동무.” 굳이 ‘애주가’라는 노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술은 분명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매개체다. 첫 만남의 서먹한 자리에서, 혹은 진솔한 대화가 필요한 자리에서 술이 윤활제인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가 축제를 주관했던 것을 보면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술은 필수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네덜란드의 학자 호이징가는 저서 ‘호모 루덴스’에서 축제와 놀이문화가 인류 사회를 발전시킨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노는 자리에 빠질 수 없는 술도 문화발전의 공신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독일에선 매년 맥주축제를 벌이고 프랑스에선 와인의 식사예절이 있는 것처럼 각 민족들은 술에 따라 다양한 문화를 형성해왔다. 하지만 축제의 신인 디오니소스가 일탈과 비이성의 신이기도 하다는 것은 술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우리나라는 술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이 큰 나라로 꼽힌다. 음주운전 사고율 1위, 성인 1인당 알콜소비량 2위 등 술 마시는 것으로는 둘째라면 서러운 국가다. 술에 대해 우리나라가 또하나 유명한 것은 폭탄주 문화다. 폭탄주는 맥주를 양주와 섞어 한 번에 마심으로써 취기를 극대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만큼 술의 원래 목적인 만남과 소통은 사라지고 빨리 취하고 망각하는 문화만 남게 된 것이다.


폭탄주는 우리의 사회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우울한 현대사를 지나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으면서 아픈 과거와 고된 현실을 잊어보려는 우리의 자화상인 것이다. 이번에 정부의 소주세 인상이 벽에 부딪힌 것도 술 한 잔에 시름을 잊어보려는 서민들의 반발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취하지 않아도 되고 잊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밝은 사회는 언제쯤 올 것인가?

 

연정(聯政)이냐, 연정(戀情)이냐?

 

“이놈아, 니가 뭐가 부족해서 맨날 쫓아다니기만 하냐?”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멀쩡한 자식이 여기저기 구애하다 차이는 꼴을 본다면 부모로서 분통이 터질 만하다. 지금 정부여당의 모습을 보고 있는 지지자들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국회에서도 제1당인 집권여당이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 당 저 당 집적거리냐는 불만이 나올 만하다. 처음엔 민주당에게 구애작전을 벌이다 차이고, 민노당은 이상형이지만 너무 도도하고, 마침내는 욕하고 미워하던 한나라당에게 연정을 구걸하고 있다. 도대체 연애의 목적이 무엇인가?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구도 타파와 정치개혁을 위해 연립정부를 제안한다고 말했다. 선거구제와 권력구조를 개편하는데 한나라당이 협조해주면 권력을 일정부분 내놓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장 상인들 거래하는 것도 아니고 정치개혁 논의와 행정부 권력을 맞교환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국민이 대통령으로 선출해준 것은 임기동안 참여정부의 목표와 방향대로 국정을 운영하라는 것이지 야당과 권력을 공유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를 선출해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물론 선진 한국을 만들어가기 위해 정치개혁은 필요하다. 투쟁과 타도의 정치문화를 화해와 대화의 정치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 제도와 구조 등 개혁 작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엔 공감한다. 하지만 그것은 국회에서 정치개혁특위를 구성하고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논의하면 되는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민노당, 민주당이 정치구조개편을 찬성하고 있는 현재의 정치구도에선 얼마든지 한나라당을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한나라당과 연립정부를 구상하려고 무리수를 두기 때문에 음모론이 나도는 것이다.


지금 노 대통령이 전념해야 할 것은 집권후반기의 국정운영이다. 정치개혁논의는 국회에 맡겨두고 정부는 그간 벌여놓은 사업들이나 챙겨야 한다. 서민경제도 챙겨야 하고 국가균형발전 사업도 갈 길이 태산이다.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국정운영에 전념하는 것이 그를 낳아준 부모, 즉 국민에 대한 도리다. 노 대통령은 부모의 따가운 충고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지금은 연애할 때가 아니라 네 본분에 충실할 때다.”

 

대북이중지원논란

 

북핵 6자회담의 합의문은 선물인가, 빚인가? 한가위 연휴의 마지막에 극적으로 타결된 합의문은 북한의 핵개발 포기를 이끌어낸 훌륭한 성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하는 탓에 선물이 아니라 빚덩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00만KW의 대북송전과 경수로 건설에다 그간 미국이 지원했던 중유공급까지 떠맡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혹시 북한은 핵을 담보로 고금리의 사채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국민적인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서 정부는 지금 성취감에 젖어있을 시간이 없다.


우선 국내적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정부는 세수가 부족하다며 서민들에게 친숙한 소주세와 LNG 특소세를 인상하려다 좌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북지원에 필요한 비용마저 국민에게 떠넘기려 한다면 국민적인 저항에 부딪힐 공산이 크다. 정부는 막대한 비용을 어떻게 조달할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국민들은 북한문제가 이번에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식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대외적으로 북한이나 협상국들과의 구체적인 후속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이번 합의문은 송민순 차관보의 말처럼 서로의 이해관계를 시급히 조율하려다 보니 ‘창조적 모호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 그 때문에 새로운 경수로를 다시 지어줘야 하는지, 경수로 완공이 끝나면 전력공급은 확실히 중단할 수 있는지, 중유는 미국이 얼마나 부담할 것인지를 명확히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만약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협상의 실패로 이 부담을 우리가 모두 떠안아야 한다면 주도적인 협상이라는 말은 허울뿐인 영예가 될 것이다.


분명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는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그에 따르는 비용도 우리가 감내해야 할 통일비용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정부는 사회의 발전과 안정에 드는 비용을 최소화해 국민들의 부담을 덜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그런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외교력이요, 국민들에게 그런 믿음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치력이다. 북핵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은 정부의 외교력과 정치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레임덕

 

요즘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 측은지심이 생긴다. 과거의 배짱은 간데없고 몇 년 사이에 기력이 쇠한 모습이다. 임기 절반이 지난 지금은 한창 국정운영에 탄력을 받을 시기인데도 벌써부터 레임덕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증상을 보아하니 지금 참여정부는 조로증(早老症)을 앓고 있다. 출생하자마자 탄핵사태와 행정수도 위헌판결 등 궂은 일을 많이 겪어서인지 일찍 늙어버린 것이다. 새 정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현 정부가 어쩌다 이런 기구한 병을 앓게 된 것일까?


우선 외적인 요인으로 기득권 세력의 방어기재를 들 수 있다. 비주류의 연이은 당선은 주류세력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고 반기득권적인 정책들은 조직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수도이전문제라든지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정리, 부동산 문제 등 참여정부의 핵심사업들이 거의 다 좌초된 마당에 국정운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이름만 대통령이었지 실상 우리나라의 권력지도는 노 대통령이 기득권 권력의 틈바구니에 편입된 구조였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유시민 의원은 노 대통령을 엄한 시댁에 시집보낸 기분이라고 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의 지지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끌고 나가겠는데, 국민들은 기득권 세력의 ‘경제논리’에 쉽게 말려들었다. 생계에 피로한 백성들은 삶의 먼 자락을 내다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참여정부의 핵심사업인 국가균형발전과 개혁정책은 단기간에 가시적인 이윤을 창출하지 않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개별 경제주체로서의 능동적 삶에 익숙지 않은 군중들은 권력을 분산하는 나약한 대통령보다 강력한 힘으로 경제적 문제를 통제해주는 군주를 원했다. 개발독재 패러다임은 시효가 끝났지만 마키아벨리즘은 한국사회에 여전히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책임은 노 대통령과 현 정권의 몫이다. 개혁의지와 열정만 있었을 뿐 전략과 전술의 부재는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정부와 여당 간의 혼선, 정책의 일관성과 추진력 부족 등 예측 가능한 정책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행정부와 원내 과반의석을 차지하고도 국정운영에 혼란을 빚었던 것은 무능력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고작 실용이냐 개혁이냐, 민주당과 합당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내부 정체성을 찾는데 기력을 소진하니 어떻게 국가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대통령의 눈물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그것이 선거용 이미지광고인줄 알면서도 5공 청문회에서의 분노와 3당 야합 때의 외침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의 눈물에 같이 감동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20%대의 지지에 낙심하며 자꾸만 연정을 호소하고 있다. 지역구도 타파와 정치개혁이라는 큰 명분에도 불구하고 연정은 조로증의 약이 아니다. 회춘하기 위해선 젊은 시절의 소신과 추진력이 필요하다. 신중하게 결정하고 그 후엔 소신껏 밀고 나가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다. 대통령님, 지지도는 숫자에 불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