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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과 북카페

짜라투스트라가 뭐라고 말했지?



1. 어느 화장실 낙서

신은 죽었다. -니체-
니체 넌 죽었다. -신-
니들 둘 다 죽었다. -청소아줌마-



2. 신은 왜 죽었을까?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왜 '신은 죽었다'고 말했을까? 단순히 과학기술과 전쟁, 인간성 상실로 얼룩진 19세기말의 무정부적 세계를 읊었다는 설명으론 뭔가 부족하다. 하지만 이런 궁금증은 있으나 니체라는 이름에 압도되어 감히 그의 책에 손이 가지 않을 때 이 책은 친절한 니체의 안내자가 될 것 같다. 

배화교의 창시자인 짜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는 인간들에게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선물로 가져온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그 사건'은 '세상 사람들에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세상 사람들은 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짜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짜라투스르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이다. (밤밤밤~빠밤! 이때 배경음악으로 슈트라우스의 '짜라투스트라는...'이 깔려야 한다.)

그렇다면 신의 죽음이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우선 기독교의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과 과학의 발달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회의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 죽음은 만물을 존재하게 해주는 어떤 초월적 실체의 사라짐을 넘어서 선악이나 미추를 판단케 해주는 절대적 가치 기준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동안 인간이 믿어오던 이분법적인 세계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적인 이분법 이후 인간은 선과 악, 고통과 기쁨, 심판과 부활, 현세과 천국 등 볼 수 없는 가상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숭배해왔다. '참된 세계'라고 명명된 가상 세계의 관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평가절하해 온 것이다. 그런데 신의 죽음은 바로 이 세계를 평가절하하는 기준이 된 그 영원한 진리나 초월적인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인 셈이다.

하지만 신은 죽었어도 신앙은 쉽게 죽지 않는다. 연약한 인간들은 자신의 삶을 지탱해줄 초월적 존재를 계속 찾아다닌다. 그것은 바로 그런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가 있어야만 우리가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이 있기 때문에 신앙이 생긴 것이 아니라 신앙 때문에 신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신을 부정하는 철학자들이나 과학의 신봉자들도 마찬가지다. 철학의 경우, 신은 부정할 지라도 형이상학적 진리를 찾으려 애쓰고, 과학도 인간을 낡은 신학에서 벗어날 수 있게는 해주었지만 대신 과학적 원리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에서 과학 역시 새로운 신학일 수 있음을 지적했다.

결국 신의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단순한 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신을 만든 신앙의 죽음이어야 하고, 결국 '신앙처럼 무언가에 의존해야만 살 수 있는 인간'의 죽음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신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며 위버멘쉬(초월적 인간)의 탄생이어야 한다. 웬 뚱딴지 같은 슈퍼맨이야기냐고? 그것은 초능력을 가진 초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진화의 과정에서 동물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인간을 넘어선 존재로의 변화다. 언제나 경배할 대상을 찾아 나귀처럼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희생하기만 하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극복하는 존재가 위버멘쉬다. 더 이상 초월적인 실체, 의존할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이 삶의 주인이 되어 환하게 웃을 때, 바로 신의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3.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을 경계하라

짜라투스트라는 세상의 인간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쏟아놓는다. "나, 짜라투스트라를 사랑하거든 나를 숭배하지 말라.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우상을 파괴하고 자신만의 믿음과 가치를 창조하라." 그러면서 타인의 가르침에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하고 자신만의 가치 창조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불임증에 걸린 내시들'이라고 비꼰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가르침을 전하는 설교자들도 비난한다. 현실의 가치를 부정하고 사후의 세계가 참되다는 그들은, 죽음을 준비하도록 가르치는 '죽음의 설교자'들이다. 

"그들이 만든 가상세계는 현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데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비난하고 삶으로부터 도피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무력함을 선량함으로 바꾸고, 겁많은 비겁을 겸허로 바꾸며 증오를 품은 채 상대방에게 복종하는 것을 순종으로 바꾼다. 이런 비참함도 준비와 시련, 훈련으로 가르친다. 이렇게 자유와 방랑을 빼앗긴 인간들은 자신에게 고통을 돌린다. 적대감, 잔인함, 공격성, 파괴의 쾌락을, 소유자인 자신에게로 돌리게 만드는 것, 바로 '양심의 가책'이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 문화로 관심을 돌렸다. 거기에는 삶에 대한 놀라운 긍정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고통의 원인을 삶에서 찾지 않고 죽음이나 신들에게 돌렸다. 사랑에 빠진 것은 에로스의 탓이고 싸움에서 패한 이유는 아테네가 적을 도왔기 때문이다. 니체는 그들이 지상의 긍지를 위해서 천상조차 모독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생각했다.


4. 광기어린 육체를 찬양하며

또한 짜라투스트라는 '신체'가 '가장 원초적인 소유물이자 가장 확실한 존재'라고 말하며 정신의 우월성을 부정한다. 신체는 단순한 욕망의 살덩어리가 아니라 수많은 정서와 감각, 생각들이 '자아'를 차지하기 위해 숱하게 싸우는 힘들의 복합체, 즉 권력의지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디오니소스적인 쾌락은 너무나 중요한 삶의 가치였다. 그는 광기, 탈주, 예외 등의 문제를 보는 시각도 디오니소스적이다. 그것은 단지 '시대가 포착하지 못하는 시간의 불일치'라는 것이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과 보편적인 신념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새롭고 좋은 작품이라도 그 시대의 습한 공기와 접촉하는 한 최소의 가치밖에 갖지 않는다." 그에게 위대함은 시대성이 아니라 비시대성에서 오는 것이다.


5. 우연과 놀이의 중요성

아인슈타인은 '신들은 우주를 대상으로 주사위 놀이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자연법칙의 중요성을 설파했지만 짜라투스트라는 세상은 '신들의 주사위 놀이판'이라며 우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사위 놀이라는 말에 과학자도 신학자도 모두다 분개하겠지만 짜라투스트라는 세상일을 어떤 목적에 꿰맞추는 것에 질린 사람이다. 제발 저 순진무구한 하늘을 그냥 내버려두고 사물들을 목적의 노예로 만들지 말라! 아낙시만드로스처럼 세상에서 영원한 진리와 목적론적 도덕을 찾는 이들은 만물의 유한함에 비통해할테지만, 생성과 소멸을 다양성의 놀이로 인식하는 그는 어떤 우울함도 느끼지 않는다. 세상의 진리와 도덕을 찾으려는 자만의 욕구를 버리고 어린아이처럼 우연의 놀이를 즐겨라! "우발적인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더할 나위없이 유서깊은 귀족이다. 이것을 나는 모든 사물에게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사물에게 목적이라는 것의 예속 상태에서 구해 주었다."


6. 어린아이의 긍정의 정신으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워즈워드의 감탄처럼 짜라투스트라도 어린아이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그는 세가지 변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먼저 희생적이고 착하다고 여겨지는 낙타를 비판한다. 그는 주인에게 대꾸 한마디 하지 않고 복종하는 바람에 자기의 삶에 얼마나 많은 고문을 가하고 있는지 모른다. 당신들 중 몇몇은 낙타다. 자기 스스로 삶을 '견뎌야할 고통'으로 만들어 놓고 '삶이란 고된 것이다'라는 말을 진리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의 세계를 사막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 단계인 사자이야기는 조금 사정이 낫다. 그는 낙타와는 달리 무조건 으르렁 거리며 부정한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 자유의 쟁취를 강조하는 모습이고, 올바른 자세라 할 수 있다. 형제들이여, 자유를 얻으려면, 그리고 의무에 대해서도 신성한 '아니오'를 말할 수 있으려면 우선 사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자도 문제가 있기는 매한가지다. 사자는 싫다고 반항할 줄만 알았지 진정으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단계는 무엇인가? 바로 어린아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양심의 가책이 없는 비도덕적 존재이다. 아이들에게는 영원한 진리나 심오한 법칙이 필요없고 단지 자신을 즐겁게 해 줄 놀이만 있을 뿐이다. 아이들의 이러한 신성한 긍정의 정신은 자신의 세계를 되찾게 한다. 우리에게도 긍정의 정신이 필요하다. 들뢰즈는 니체의 긍정에 대해 언급하기를, '긍정은 부정을 포함하지만 부정은 긍정을 포함할 수 없다'고 했다. 즉, 부정으로부터는 긍정이 나올 수 없다는 얘기다. 아무리 파괴와 거부를 해도 그것이 어떤 창조와 생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창조하고 생성하기 위해 파괴와 해체를 한다면 그것은 긍정에 포함된 부정이며 더 이상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 된다는 것이다.


7. 니체의 추종자들

니체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무수히 많다. 철학, 역사, 음악, 미술 등 여러 분야에서 그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니체와 철학'을 쓴 들뢰즈와 데리다, 푸코 등의 후기구조주의자를 꼽을 수 있다. 1960년대 이후로 니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나오고 있는데 이들은 니체의 텍스트는 총체적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니체가 세계를 체계적으로 근거짓는 궁극적 진리를 찾으려 한 형이상학자들의 불가능한 시도를 비판한 것과 같다. 하지만 해석의 불가능을 말한 데리다가 불행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니체의 텍스트는 어떤 권위나 중심도 없는 수많은 해석의 놀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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