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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과 북카페

나쁜 사마리아인들




성경에는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지위가 높은 제사장은 그냥 지나가 버리는데, 유태인들에게 멸시받아 온 사마리아인은 그를 치료하고 안전한 곳으로 데려간다. 예수는 이것을 보고 진정한 이웃은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지 출신 성분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가르침을 던져준다. 이 성경 이야기를 토대로 일명 ‘착한 사마리안 법’도 만들어졌다. 누군가 위험에 처한 것을 목격했을 때 자신이 위험해지지 않는데도 구조활동을 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법이다. 미국이나 영국, 호주에서 실행되고 있는데, 그야말로 성경의 가르침을 엄격하게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 등 선진국들은 자국 내에서는 이런 법을 통해 이웃돕기를 강조하면서도 실상 다른 국가에 대해서는 ‘나쁜 사마리아인’으로 행동하고 있다.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 낙후된 나라들을 경제적 위험으로 더 몰아가고 있다. 캠브리지대의 장하준 교수가 쓴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구체적인 사례와 역사적 실증을 통해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허상과 선진국들의 위선을 고발하고 있다.

선진국은 자유무역을 해야 경제가 성장한다고 개발도상국들을 유혹하지만, 실상 자유무역은 성장률을 둔화시키고, 외국자본에 대한 무분별한 개방은 결국 국내 산업에게 독이 된다는 게 핵심이다. 그리고 선진국들도 과거에 보호무역을 통해서 지금의 위치에 올랐으면서도 마치 자유무역을 통해 성장한 것처럼 정사(正史)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뒤 후발주자들은 사다리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걷어차기를 하고 있다고 비꼰다.

선진국의 주장과 달리, 통제된 세계화 시기(보호무역 시기)의 세계 경제는 최근에 비해 훨씬 빠르게 성장했고, 훨씬 안정적이었으며 소득 분배도 훨씬 균등했다.

영국은 19세기 중반까지 고도의 보호무역 국가였다. 1820년대 영국의 경우 수입 공산품에 대한 평균 관세율은 45-55%에 이르렀다. 또 영국이 무역정책에 활용한 무기는 관세만이 아니었다. 영국은 식민지에서의 선진적인 제조 활동에 대해 무조건적인 금지령을 내렸다.

또 경제학에 근거해서도 자유무역 이론은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나 리카도가 주장한 ‘비교우위론’도 결국은 현재 상황을 놓고 본 근시안적인 경제운용 방법이라고 말한다. 한 나라가 장기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당장 무엇을 팔아야 이익이 될까만 고민해서는 안 되며 중장기적으로 무엇에 투자할는지 등을 고려해야 하고, 일정 부분 현재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카도의 이론은 절대적으로 옳다. 정확히 말해 각 나라들이 ‘자신의 현재 기술 수준을 그대로 감수하는 한에서는’ 자신이 비교적 잘 하는 것들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다. 그의 이론이 통하지 않는 것은 어떤 나라가 보다 고도의 기술을 획득해 대부분의 다른 나라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들을 하고자 할 때, 즉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할 때다. 리카도의 이론은 현재 상태를 그대로 감수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현재 상태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비교우위론을 놓고 본다면, 영국의 헨리7세는 자신의 조국이 유능한 원모 생산자인 만큼 계속 그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시장의 신호를 무시하고, 현실을 왜곡시키는 정책(저지대국에서 더 비교 우위에 있는 섬유 제조 산업)을 도입함으로써 영국을 선도적인 제조업 국가로 변모시키는 과정의 막을 열었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오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헨리7세처럼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필요하다.

자유무역 이론은 주어진 자원을 단기간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하는가와 관련된 이론이지, 장기적인 경제 발전을 통해서 가용자원을 늘려가는 것과 관련된 이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무역 자유화는 경제 발전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결과다.

그러면서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의 주장도 반박해버린다. 프리드먼은 세계화가 기술과 정보의 발달로 인해 불가항력적으로 도래하는 흐름이라고 했다. 하지만 저자는 세계화는 각 국가들의 선택의 문제지 통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세계화와 관련해서 불가항력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화의 주된 추진력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주장하듯 기술이 아니라 정치, 즉 인간의 의지와 결정이다. 만일 기술이 세계화의 정도를 결정한다면, 증기선과 유선전신에 의존하던 1870년대보다 현대화된 운송과 통신기술을 확보하고 있던 1970년대에 세계화가 덜 진전된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기술은 세계화의 외부적인 경계를 규정지을 뿐이다. 엄밀히 말해 세계화가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지의 여부는 우리가 어떤 국가 정책을 만들고 어떤 국제 협정을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조국인 한국을 대표적인 보호무역의 성공사례로 인용한다.

한국이 자유무역을 추구했다면 지금과 같은 중요한 무역 국가가 되지 못하고 아직도 1960년대 주된 수출 품목이던 텅스텐 원광이나 생선, 해초 등의 원료들이나 직물, 가발 같은 낮은 기술, 낮은 가격의 상품들을 수출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의 성공비결은 새로운 유치산업이 발전하여 노련해지고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지게 됨에 따라 보호하는 분야를 끊임없이 바꾸어가면서 보호와 개방무역 정책을 적절하게 혼합한 데 있다.

경제발전이라는 목표에 이르는 최선의 길은 자유무역이 아니다. 한 나라가 자국의 필요와 능력이 변화하는 정도에 어울리도록 조정된 보호와 보조금의 혼합정책을 꾸준히 사용할 때에만 무역은 그 나라의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

그는 외국인 투자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물론 국가경제가 성장하는데 외국 자본의 공급이 중요하지만, 생산 부문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주식이나 채권 투자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설사 공장을 짓더라도 고용 창출이나 기술 이전에 도움이 안 된다면 경제발전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외국인 직접투자는 여유 자본의 공급원이자 건전한 대외 균형의 달성에 기여하는 것으로 생산성 증대와 고용 증대, 효율적인 경쟁, 합리적인 생산 및 기술 이전의 토대이자 경영 노하우의 공급원이다. 하지만 초국적기업이 필요한 모든 부품은 수입하고 해당지역 노동자들은 단순한 조립에만 참여시키는 이른바 enclave 시설을 세우는 경우는 곤란하다. 투자유치국 정부들이 파급효과를 증대하기 위해 기술이전, 국내 부품 조달, 수출 등과 관련된 이행 요건을 부과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외국인 직접 투자는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이것은 외국인 직접투자가 장기적인 발전 전략의 일환으로 도입되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세계화의 기준을 맞추고 규제를 풀어야만 외국인이 투자한다고 하는 것도 의심해봐야 한다. 조사 결과, 기업들이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투자 유치국의 시장 잠재력, 노동력과 사회간접자본의 우수성 같은 사항이다. 규제는 크게 관심 두지 않는다.

장하준 교수는 재정적자를 줄이고 물가안정을 맞추라는 신자유주의적 강요도 개발도상국에는 잘못된 처방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IMF 구제금융 당시에도 선진국들이 우리에게 이같은 경제운용을 강조해 회복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결국 국가든 기업이든 일정 부분 빚을 내서 투자하지 않고 현재의 예산 균형만 생각해서 경영하면 성장이 어렵다.

개발도상국이 현재의 세입을 넘어서는 투자를 하여 경제성장을 가속화시키기 위해서 ‘미래세대에게서 대출하는 방식’으로 적자 예산을 운영하는 것은 합리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개별 경제주체들이 공부를 하거나 자녀를 양육할 때 돈을 빌렸다가 소득이 많을 때 상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산의 균형이라는 것은 결국 회계연도를 기준으로 한 1년 단위로 볼 것이 아니라 한 경제 순환주기를 기준으로 달성돼야 한다. 회계년도는 인위적인 시간일 뿐이다.

저자는 이밖에도 지적 소유권의 문제, 민영화 문제, 그리고 각국의 문화와 경제발전의 관계 등에 대해서도 논리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결국 선진국들이 강조해 온 이론과 근거들이 허상일 수 있음을 얘기하고 싶었던 게다. 그러면서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보호주의로 성장한 만큼, 개발도상국들의 성장을 위한 보호주의적 정책들을 지원하는 ‘착한 사마리아인’들이 돼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2009.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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