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헌책방과 북카페

강남별곡

 



살어리 살어리랏다 강남에 살어리랏다

강남은 '욕망의 땅'
물질에 대한 욕망, 교육에 대한 욕망, 성적인 욕망이 뒤엉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바벨탑을 쌓았다

강남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누구나 그곳을 선망하고 그곳으로의 엑소더스를 꿈꾸며
강남에 대한 믿음은 종교보다 뜨겁다 


고교 시절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을 접했을 때 난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런 부실한 건물이 들어설 수 있었던 한국적 현실에 분노했고, 외부의 사회적·자연적 영향에 힘없이 죽어갈 수밖에 없는 인생의 허망함에 며칠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기말고사 기간이었는데 공부는 아예 손을 놓고 뉴스와 신문만 봤고, 심지어 삼풍을 배경으로 한 소설도 끄적대기 시작했다. 황석영의 '강남몽'은 자연스럽게 그때를 떠올리게 한다.

'강남몽'은 한국현대사의 요약판이라 할 만하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과 군사독재, 강남개발에 이르기까지 기회주의자들은 어떻게 갈아타기를 하며 생존해왔는지, 우리 사회는 어떻게 그런 기회를 제공해왔는지를 묘사해주고 있다. 그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삼풍이다. 삼풍 붕괴는 강남으로 대변되는 한국 개발사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강준만의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도 삼풍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군사독재와 천민 자본주의가 이끈 한국현대사의 풍경은 한마디로 '위험을 무릅쓰는 문화'였는데, 강남이 진원지이고 그 정점에 삼풍이 있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빌리자면, 삼풍은 '떼부자들이 사는 강남 아파트 한 가운데에', '권력의 암투가 끊이지 않는 법원청사를 바라보고 있는', '자본주의가 생산한 상품들이 집약돼 있는 백화점'이다. 다시 말해 한국사회의 특수한 권력과 자본의 집산지에서 최고 상품이 무너진 것이다.

저자는 강남 개발의 가장 큰 부작용으로 한국사회 전역에 팽배해있는 '공공영역의 부재'를 지적한다. 이런 각개전투식 생존경쟁 속에서 개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은 부동산 투기와 미친 교육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 하나를 더해, 강남 개발의 역사는 성실하게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이 통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강남이 한국의 성장을 이끈 자본주의의 엔진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보다 높은 곳을 향한 욕망과 전투적인 삶의 태도 등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선도한 '강남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에 실린 강남의 과거 사진들을 들여다보는 건 흥미로웠다. 지금의 고층 빌딩숲과 비교하면 강남의 옛모습은 보고 또 봐도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소설 '강남몽'은 좀 실망스럽다. 내용은 뻔하고 호흡은 지루하다. 서사적 긴장감도 없다. 방대한 역사의 궤적을 몇몇의 인간상으로 다 품으려고 하다보니 억지스러운 부분도 많았다.



 

'헌책방과 북카페' 카테고리의 다른 글

Soft Power  (0) 2014.08.24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마이클 샌델  (0) 2012.07.08
정의란 무엇인가  (0) 2010.10.10
엔트로피  (0) 2010.10.10
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  (0) 2010.10.10